HERMES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아홉 번째 방. 원통형 회전 광고판과 가로등이

천장에 거꾸로 설치된 가운데 에르메스 신상 제품을 설치해 놓았다.

이번 전시를 위해 내한한 큐레이터 브뤼노 고디숑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전시 ‘원더랜드(Wanderland)-파리지앵의 산책’

(11월 19일~12월 11일 서울 한남동 디뮤지엄)은 몇 가지 측면에서 흥미롭다.

에르메스는 설립 150주년을 맞은 1987년부터 매년 브랜드의 정신을 담아낸 테마를 정해왔는데,

스물아홉 번째인 2015년의 주제는 ‘플라뇌르 포에버(Flaneur forever)’였다. 플라뇌르는

프랑스어로 ‘여유로운 산책’이라는 뜻인데,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과 열정으로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가미돼 있다. 이 테마를 주제로 대형 전시를 기획하고, 지난해 런던

사치 갤러리를 시작으로 파리와 두바이를 거쳐 서울로 이어지는 월드 투어(이후 상하이와 대만

전시가 예정돼 있다)에 나섰다는 것은 그만큼 브랜드의 본질이 잘 녹아있는 기획으로 여기고

있다는 얘기다(올해의 테마는 ‘자연으로의 질주’였는데 별도의 전시는 없었다). 게다가 에르메스의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인 피에르-알렉시 뒤마(Pierre-Alexis Dumas)가 “월드 투어에 서울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덕분에 서울 전시가 처음으로 성사됐다. 에르메스 ‘원더랜드-파리지앵의 산책’전 가보니

이 전시는 단순한 신상품 소개가 아니라 에밀 에르메스 박물관 소장품과 아카이브 및 최신 컬렉션,

현대미술 작가들과의 절묘한 매치를 통해 브랜드 전시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 속에는 전통과 최신 유행, 예술성과 상업성, 일상과 초현실, 모던과 포스트모던 같은

아름다운 모순이 숨어있다. 무엇보다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머 코드야말로

전시를 즐기는 또 다른 재미다. 브뤼노 고디숑 큐레이터와 함께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파리 거리를 산책하는 파리지앵들의 영상물을 전시한 첫 번째 방 ‘플라네(산책하는 사람)’.

전시장 입구에서는 관람객에게 지팡이가 하나씩 주어졌다. 끝에 동그란 렌즈가 달려있다.

얼핏 보기에 평범한 렌즈 같다. 브뤼노 고디숑 큐레이터는 “서울 전시에는 다른 도시에서

선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산책의 요소를 곳곳에 가미했는데, 이것도 그 중 하나로

곧 쓸 데가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보통 전시는 움직이지 않는 것들로 구성돼 있는데,

우리 전시에서는 움직이는 것들을 많이 보게 될 것”이라며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숨겨져

있으니 산책하듯 천천히 돌아보며 디테일한 발견의 재미를 느끼라”고 당부했다.

다양한 지팡이들로 가득한 두 번째 방

편광 렌즈 지팡이로만 볼 수 있는 영상물

[현대미술 작품과 절묘한 매치, 브랜드 전시 새 장 열어]
전시장은 11개의 코너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 코너의 이름은 ‘플라네(FLANER)’, 산책하는 사람이다.

알록달록한 조명 아래 벽면 곳곳에 배치된 화면에서는 영화 클립 18편이 상영되고 있었다.

800년에서 2011년 사이의 작품으로 주로 산책을 하는 파리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본격적인 산책의 시작을 알리는 공간인 셈이다. 두 번째 방의 주인공은 지팡이였다. 고디숑은 “이번

전시의 상징은 19세기 신사이자 산책가들의필수품이었던 지팡이”라며 “에르메스 3대 회장인 에밀

에르메스는 12살부터 지팡이를 수집해 왔는데 그 컬렉션에서 가져온 5점을 특히 주목해달라”고 말했다.

아티스트 위고 가토니가 디자인한 지팡이 문양의 벽지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로맹 로랑이 연출하고 파리국립오페라의 수석 무용수

제레미 벨링가르가 다양한 지팡이 사용법을 알려주는 짧은 안무 영상들도 눈길을 끌었다.

천정에 달린 파라솔 겸 지팡이는 에르메스 장인과 현대 파라솔 디자이너에 의해 꿩 털 등으로 정교하게 재현된 제품이다.
방 한가운데에 옷장 같이 생긴 문이 있었다. 고디숑이 말했다. “옷장 문이 열리면 이상한 세계로 들어갑니다.

우리 모두가 앨리스가 되는 거죠.” 옷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커플의 드레스룸이 좌우로 펼쳐져 있다.

왼쪽은 깔끔하게 잘 정리된 여성용 공간, 오른쪽은 스포츠 매니어의 느낌이 부산스러운 남성용 공간이다.

산책을 나가기 위해 차려입는 곳이다. “뭘 입고 나가나” “뭘 들고 나가나”라는 고민을 해소시켜 주려는 듯,

가죽 재킷과 켈리백 같은 대표 상품들이 보는 이를 유혹한다. 신상뿐만 아니라 빈티지 제품도

적절히 섞어 은연중 장인 정신을 드러냈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디스플레이 방법이었다.

관람객이 전시에 집중하도록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일례로 전시 작품을 비추는 조명은 켜졌다

꺼졌다 함으로써 주목도를 더 높였다. 좀 보려하면 불이 꺼지니 하나씩 보려면 시간을 들여 집중해야 했다.

특히 말 머리 조각상은 가만히 있지 않고 가끔 혀를 날름 거렸는데, 그걸 보고 웃느라 또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네 번째 코너는 교차로다. 열심히 걷던 사람이라도 건널목에 서서 잠깐 멈춤 하는 곳. 주위 벽면에 붙어있는

스카프에는 파리 거리의 과거와 현재의 풍경이 뒤섞여 그려져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동그란 유리 화면이다.

그냥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지팡이의 렌즈를 들이대니 마법처럼 영상이 펼쳐졌다.

장-밥티스트 디 마르코가 제작한 코믹한 비둘기 애니메이션이다. 왜 비둘기일까 했는데 ‘아, 이 공간은

지금 산책하는 길이자 광장이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편광 렌즈를 대면 보이고

떼면 안 보이는 영상물은 곳곳에 마련돼 있었는데, 어른들이 해봐도 재미있었다.

여섯 번째 방인 파리의 아케이드

다음에 펼쳐진 것은 파리의 아케이드였다. 유리로 된 돔 형 천장 덕분에 19세기 파리지앵들은

비로소 비가 와도 거리에서 물건을 사고팔 수 있게 됐다. 근대화의 흔적이 남아있는 아케이드의

컨셉트를 이국적으로 풀어낸 형식이 독특했다. 유리장 속 거대한 코끼리가 에르메스의 테이블웨어를

조심스레 들고 있는 코너부터 눈길을 끌었다. 코끼리의 중량감과 얇은 도자기의 불균형한 대칭이

보는 이의 긴장감을 자극했다. 19세기 만들어진 골동품부터 2015년 제작된 최신 상품이 어울려 있는

묘한 불균형 역시 시선을 끄는데 한몫했다. “고무나 털로 만든 가방처럼 상상하는 모든 것을

다 만들 수 있다는 에르메스의 장인 정신을 강조했다”는 것이 고디숑의 설명이다.
여섯 번째 공간의 제목은 ‘비 온 다음’이다. 미디어 아티스트 니콜라스 투르트의 길바닥

물웅덩이 작품이 관람객을 맞았는데, 더 흥미로운 것은 자전거 핸들에 앉아있던 비둘기였다.

헬멧을 쓰고 마치 페달이라고 밟겠다고 엉덩이를 치켜든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2층에 올라가면 처음 만나게 되는 ‘잊혀진 물건들의 카페’. 작게 보이는 ‘핫도그클럽’도 눈길을 끈다.

카페 벽면에 설치된 피자 모양의 시계

한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제이플로우가 그린 파리 지하철 풍경

신비한 음악과 함께 전시물이 움직이는 ‘아이 스파이’방

[“잘려진 피자 모양의 시계, 잃어버린 시간 은유”]
1층 전시가 끝나고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나라와 달리 두 개층에서 전시를 해야했기에 이곳은 새로운 도전의 공간이었다.

고디숑은 “물랑루즈를 지나 몽마르트 언덕을 올라가는 느낌을 주기 위해 파리의 어스름 밤풍경을

묘사했다”며 “저녁이 되었으니 이제 파리의 명물인 카페로 가서 파리지앵들과 한 잔 할 차례”라고 말했다.
카페로 들어가기 직전 벽면 구석에 반쯤 열린 개집이 보였다. 그 뒤로 번쩍이는 불빛과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마 동네 개들도 모여서 파티를 즐기는 듯 했다. ‘잊혀진 물건들의 카페’라는 이 공간에서는 우선 벽면에 붙어있는

시계가 독특했다. 마치 피자 한쪽을 잘라 먹은 듯한 모양이었다. 테이블 마다 설치된 작은 아이템을

들여다보면 작은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잘려진 피자 모양의 시계는 잃어버린 시간을 은유합니다.

젊은 날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고 싶었어요. 테이블마다 니콜라스 투르트가 만든 각기 다른 디지털 오브제들이 있는데,

그걸 보면서 여기는 누가 앉았다 갔을까 하고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나요?”
여덟 번째 방은 초현실의 공간이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된 세상. 큐레이터 말대로 “파리의 과거와

현재의 사이에서 길을 잃게 되는 곳”이다. 한가운데에 회전하는 19세기 원통형 광고판이 거꾸로 설치돼 있다.

이 뒤집힌 공간에 작가 엠마누엘 피에르는 ‘상상 속 콘서트’ 포스터와 에르메스의 형형색색 가방들을 집어넣었다.

역시 뒤집혀 붙어있는 가로등의 끝에는 전구 대신 시계를 디스플레이 했다.
아홉 번 째 공간에서는 거리의 예술이 펼쳐졌다. 이 공간은 전시가 열리는 나라의 아트스트와 협업으로 진행되는데,

서울 전시는 그래피티 작가 제이플로우(Jayflow)가 그린 파리 지하철 내부의 역동적인 모습으로 꾸몄다.

“산책에도 리듬이 필요한데 새로운 리듬을 제공했다”는 설명이다. 거리를 지나 이제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창문이 커다란 어떤 집의 내부가 환하게 보인다. 관음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집 주인의 내밀한

삶에 시선이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망명한 러시아 제국의 공주가 잠시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곳에 부부 아티스트 피터 컨과 피엣 에스오는 재미있는 장난을 했다. 일례로 주전자와 찻잔이

공중부양을 한다. 물건들이 움직일 때는 유령 영화에 나오는 음악까지 사용해 효과를 더했다.

신비하고 웅장한 미디어 파사드가 펼쳐지는 마지막 전시공간 ‘홈’.

마지막 열한 번째 공간은 문이다. 이제 다시 집으로 갈 시간이다. 위고 가토니가 그린 평면 흑백

드로잉 위에 비디오 아티스트 시그마식스가 다채로운 영상을 쏘아 웅장한 미디어 파사드를 연출했다.

시시각각 형태가 변하며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듯 생생한 느낌을 준다. 고디숑은 “산책을 하다 보면 비도 맞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번 전시의 기획의도”라며 “지금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찾아내는 것도 삶의 재미 아니겠는가”라며 설명을 마쳤다. 입장료는 없다. ●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에르메스